계승된 “지역 활성화・인재 육성”의 DNA (2)

~ 사막을 녹지로 바꾼 카와스지몬(川筋者)의 혼 ~

PICK UP 특집

나카무라 테츠 의사

아프가니스탄 동부 잘랄라바드 근교. 한때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였던 곳에 수로를 끌어들여 녹지를 되살려낸 나카무라 테츠 씨. 그의 행보는 단순히 한 의사의 자선 활동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고향 와카마츠의 풍토가 길러낸 '지역 살리기'에 대한 열정과 혈통에 흐르는 '사람 만들기'의 DNA, 그리고 소년 시절부터 변치 않았던 '생명에 대한 깊은 경외'가 맥동하고 있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메마른 땅을 적시듯, 그가 남긴 유지는 지금도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타마이 가문의 혈맥과 '곤충 소년'의 잔상

1946년 9월,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난 나카무라 테츠 씨의 뿌리를 찾아가면 와카마츠 땅에서 '카와스지 기질'이라 불렸던, 거칠면서도 정이 두터운 문화에 다다르게 됩니다. 외할아버지 타마이 긴고로는 항만 하역을 담당하는 '타마이구미'를 이끌며, "어려운 사람은 손익을 따지지 않고 돕는다"라는 윤리관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품은 아버지 츠토무의 인간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긴고로의 딸 히데코와 결혼한 츠토무는 소규모지만 '나카무라구미'라는 하역 회사를 경영하며 거친 사나이들이 모이는 항만 현장에 몸을 담았던 한편,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히데코의 오빠인 히노 아시헤이(다마이 가츠노리)와 문학론을 나눌 정도의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진흙 투성이가 되어 중장비를 다루면서도 냉철하게 문명을 비평하고 집필 활동을 이어갔던 나카무라 데츠 씨의 모습은, 사회운동가였던 아버지의 강직한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타마이 가문과 나카무라구미 사람들 사이에서 소년 시절의 그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북적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뒤로하고 혼자 와카마츠의 산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쫓았던 것은 나비나 하늘소 같은 작은 생명이었습니다.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벌레를 관찰하던 소년은 파브르의 『곤충기』를 동경하며 장래에 곤충학자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그런 테츠 소년에게 삼촌 히노 아시헤이는 큰 존재였으며, 자주 '카하쿠도(河伯洞)'를 방문해 와카마츠의 바다와 산을 함께 걸으며 곤충 채집에 몰두하는 가운데, 그는 자연에 대한 경의와 생명의 순환을 무의식 중에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나카무라 테츠 소년(N자가 적힌 모자), 그 뒤로 삼촌 히노 아시헤이, 왼쪽 끝에 서 있는 분이 할머니 타마이 만 씨

파키스탄에서 받은 충격

그 후로도 그의 '곤충 사랑'은 식지 않았고, 대학생이 되어 큐슈의 산들을 누비는 사이 어느덧 해발 3,000~5,000미터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고산나비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습니다.

큐슈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가 된 나카무라 씨는 이 환상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히말라야 기슭에 가기 위해 1978년 등반대 팀 닥터로서 힌두쿠시 산맥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파키스탄 현지에서 본 한센병 환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고, 강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1984년 페샤와르회의 일원으로서 파키스탄 부임을 결심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혈맥에 흐르는 '카와스지 기질'을 불태우는 대장부다운 결단이었습니다.

이렇게 한센병 환자 치료에 전념하는 한편, 전쟁을 피해 온 많은 아프간 난민을 진료하던 나카무라 의사는 1986년 아프가니스탄 국내 활동을 시작하여 산악 지대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 지원을 넓혀갔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과거 최악이라 불리는 대가뭄이 발생했습니다. 식수가 고갈되고 가축이 전멸했습니다. 물을 찾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든 마을을 떠났고, 얼마 남지 않은 흙탕물을 마신 아이들에게 감염병이 만연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함께 일하며 지도하는 나카무라 테츠 씨

일본의 전통 기술로 수로를 끌어와 적셔진 대지

대가뭄으로 갈라진 땅 위에서 아이들은 약이 아니라 물을 구하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약으로 굶주림은 고칠 수 없다. 물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나카무라 의사는 2003년부터 "100개의 진료소보다 하나의 운하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루와리드 운하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스스로 중장비 조작법을 배우고 현지 사람들과 함께 땅을 팠습니다.

하지만 관개수로 건설은 단순한 토목 작업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전란에 더해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닥치는 자연의 맹위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건설 현장은 여름 기온이 50℃를 넘나드는 혹서 지대로, 착공 후에도 몇 번이나 대홍수가 덮쳤습니다. 공들여 쌓은 호안과 보가 탁류에 휩쓸려 수개월간의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굴착 경로에 거대한 암반이 가로막아 인력이나 구식 중장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또한 작업원이 납치되거나 건설 현장이 전쟁터로 변할 위험을 안고 작업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현지 주민들의 불신을 씻어내기 위해 스스로 진흙투성이가 되어 함께 일함으로써 그들과의 신뢰 관계를 쌓아 나갔습니다.

고난 끝에 2010년 마침내 완공된 총 길이 약 25km의 수로는 과거의 황무지를 16,000헥타르의 녹지로 바꾸어 65만 명의 삶을 지탱하게 되었습니다. '일우조명(一隅を照らす: 한 구석을 밝힌다)'이라는 말을 몸소 실현한 이 사업은, 기술적인 완벽함보다 현지의 자연과 인간에게 다가가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전문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나카무라 씨가 참고한 것은 에도 시대에 후쿠오카번이 만든 '야마다 보(山田堰)'의 치수 기술이었습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돌과 대나무를 사용해, 만에 하나 부서지더라도 현지 농민들이 스스로 복구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기술이었습니다. 콘크리트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돌쌓기 방식의 보. 이는 소년 시절 파브르로부터 배운 '자연과의 공생'을 실천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야마다 제방을 모델로 한 아프가니스탄 쿠나르강 취수보

흉탄에 쓰러졌을지라도, '물'은 계속해서 흐른다

2019년 12월, 자랄라바드를 이동 중이던 나카무라 씨는 무장 집단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3세. 그 비보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고 일본 전역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했고, 현지 농민들은 나카무라 씨를 '카카 무라드(존경하는 어른)'라 부르며 그가 남긴 운하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나카무라 씨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천한 것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와카마츠에서 길러진 '사람 만들기'의 씨앗을 멀리 떨어진 타국 땅에 뿌리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즐겨 썼던 '일우조명'이라는 말 그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곳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남긴 DNA는 지금 아프가니스탄 농민들의 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뜻을 잇는 일본의 젊은이들에 의해 다음 단계의 '지역 살리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애니메이션 시리즈 「나카무라 테츠 이야기」 마른 땅을 녹지로 바꾼 의사
https://www.youtube.com/watch?v=mHNSZskiRMU

아프가니스탄 영구 지원을 위해 - 나카무라 테츠 차세대 프로젝트
https://www.youtube.com/watch?v=kjk3lgS7_1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