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일으킨 거인들(4)
히노 아시헤이가 그린 와카마츠와 열정적 인생
PICK UP 若松ゆかりの著名人 특집

火野葦平
히노 아시헤이는 1938년, 31세의 나이에 『분뇨담(糞尿譚)』으로 제6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이후 종군기 『보리와 병사』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전후에는 자신의 뿌리인 항만 노동자의 세계를 그린 『꽃과 용』으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이 작품은 고향 와카마츠의 활기찬 풍경과 의리와 인간미, 그리고 강렬한 생명력을 전국에 알리고 고장의 혼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호탕한 문학 활동의 이면에서 그는 전후의 심한 비판과 문학적 고뇌에 직면했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젊은 문학 청년의 선택
히노 아시헤이(본명: 타마이 카츠노리)의 부친 타마이 킨고로는 시코쿠 마츠야마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시모노세키와 모지에서 혹독한 항만 하역 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아내 만과 함께 와카마츠로 이주하여, 항만 하역업체인 ⎡타마이구미(玉井組)⎦를 설립했다.
1907년 1월, 타마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시헤이는 구 코쿠라 중학교(현 코쿠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병역으로 인해 휴학하게 되었다. 제대 후에는 복학하지 않고 와카마츠로 돌아와 가업을 돕는 길을 선택했다.
그 배경에는 부친 킨고로의 삶과 가업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사상적 방황 등,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항만 하역의 기계화가 시작된 와카마츠 항에서는 인력에 의존하던 소규모 사업자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타마이구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친을 돕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자각. 흙탕물과 석탄의 분진 속에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절실한 ‘진실’을 발견한 아시헤이에게 대학 중퇴는 ‘와세다라는 지식인의 세계’로부터 ‘부친과 같은 지평에 선 노동자’에의 전환이었다. 이는 부친의 의향이라기보다 아시헤이 자신의 정신적 변화가 와카마츠에 남기로 결심하게 한 것이다.

전쟁 중의 공적과 전후 문학 활동
1937년 11월, 히노 아시헤이는 동인지에 분뇨 수거업을 소재로 한 『분뇨담』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중일전쟁 시 군복무 영장을 받은 뒤 입대하기 전까지 완성한 것으로, 완성 원고를 친구에게 맡기고 전선을 향했다.
이듬해 2월, 『분뇨담』은 제6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심사위원이었던 사토 하루오는 “천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 깃든 압도적인 생명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힘이 기존 문학에는 없었던 새로움”이라며 극찬했다.
수상 소식은 군 연락망을 통해 중국 전선의 주둔지(항저우)에 전달되었고, 일개 병사가 전선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전례 없는 사건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종군 체험을 바탕으로 한 『보리와 병사』(1938)가 전시 일본에서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히노 아시헤이는 국민적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 작품을 포함한 ‘병사 3부작’은 종군 병사의 일상적 고뇌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국가에 협조적인 ‘병사 작가’라는 평가를 높였다.
그러나 종전을 맞이하면서 전쟁 협력자라는 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거쳐 그는 자신의 문학을 재성찰하고, 가족의 역사를 모델로 한 장편소설 『꽃과 용』을 1953년부터 잡지에 연재했다. 이 작품은 사회적 현상이 될 정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벽을 깬 전후의 큰 성과로서, 그의 작가로서의 부활와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고향 와카마츠 활성화에 기여한 역할
히노 아시헤이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고향 와카마츠의 이미지를 전국에 알리며 관광 자원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꽃과 용』은 와카마츠를 무대로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석탄 적출항으로 번성하던 와카마츠 항의 활기, ‘곤조’라 불린 노동자들의 의협심, 그리고 와카마츠 특유의 깊은 인간미와 뜨거운 기풍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또한 이 지방에 전해온 갓파(河童) 전설을 사랑했던 아시헤이는 『돌과 못』, 『갓파 만다라』 등 갓파를 모티프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겨, 고장 특유의 유머와 환상을 와카마츠의 매력에 추가하였다.
전후의 어두운 시대상을 비추며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과 타카토 산의 ‘갓파 봉인지장’ 전설을 결합한 그의 발상은, ‘횃불 행렬’과 ‘갓파 축제’가 결합된 행사로 발전하였다. 매년 7월 하순에 열리는 ⎡불축제 행사⎦에는 많은 시민이 횃불을 들고 타카토 산 정상을 향하는 여름의 풍물이 되었다.
또한 향토 예능으로 알려진 ⎡고헤이타바야시⎦의 가사를 쓰고, 도카이만에서 석탄을 운반하던 고헤이타선의 뱃사공들이 배의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던 전통을 ‘향토의 자부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는 매년 1월 하순에 열리는 ⎡아시헤이 기일⎦과 지역 축제에 빼놓을 수 없는 전통예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죽음’으로 완성한 문학적 결말
960년 1월 24일, 히노 아시헤이는 자택(카하쿠도) 서재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3세였다.
건강 악화로 인해 처음에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으나, 12년 뒤인 1972년 3월 유족이 수면제를 이용한 자살이었음을 공개했다. 자살의 배경으로는 ‘전범작가’라 불리게 된 고통, 신체적 쇠약과 불안 등을 들고 있으나, 유서에는 “죽겠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는 다르겠지만, 어떤 막연한 불안 때문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안녕히.”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으로 알려진 『혁명 전후』는 1959년 5월부터 잡지 『중앙공론』에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1960년 1월 30일, 그의 사망 6일 후였다. 전쟁 중 ‘병사 작가’로 명성을 얻은 히노 아시헤이가 종전 전후의 혼란과 자신의 전쟁 책임, 그리고 변모하는 전후 사회상을 그린 이 장편소설은 높이 평가되어 제16회 일본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카하쿠도(河伯洞) https://www.japanheritage-kannmon.jp/concierge/shop_detail.cfm?id=84
히노 아시헤이 자료관 https://www.japanheritage-kannmon.jp/concierge/shop_detail.cfm?id=111
치쿠젠 와카마츠 불축제 행사 https://www.youtube.com/watch?v=cwEOGzQ8b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