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활성화의 거인들 (3)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를 질주한 이색 정치가, 요시다 이소키치
PICK UP 특집
2만여 명이 참석한 장례식. 와카마츠 역은 조문객으로 넘쳐났고, 전직 총리까지 달려온 고별식. 1936년 1월, 한 남자가 영면에 들었다. 히노 아시헤이의 소설 『꽃과 용』에 등장하는 요시다 이소키치는 ‘규슈의 대오야분’이라 불리며, 평생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았던 이색적인 인물로, 훗날 국회의원으로 활약한 사람이었다. 빈곤에서 일어나 ‘가와스지모노(川筋者)’의 정점에 서고, 마침내 국정의 무대로 올라선 그의 생애는 근대 일본의 빛과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가와히라타’ 뱃사공에서 “대 오야분”으로
1867년 6월, 온가군 아시야촌(현 아시야정)에서 태어난 요시다 이소키치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집안은 대대로 마츠야마번의 무사 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도쿠헤이의 탈번으로 여러 지방을 떠돌다 아시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소키치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난 가족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며 바다에서 조개를 캐 노점에서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지역사회에서 멸시를 받기도 했다.
16세가 된 이소키치는 온가강을 오가는 ‘가와히라타’의 선두가 되었고, 뛰어난 완력과 담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가와스지 몽’ 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임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시대가 크게 변하기 시작하면서 지쿠호 흥업철도의 개통으로 온가강의 수운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이소키치는 신흥 항만도시 와카마츠로 활동 거점을 옮기고, 시집가 있던 누이의 집에 머물며 임협 세력 속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01년, 와카마츠의 맞은편 야하타에서 관영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호황의 소용돌이에 이끌려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회사와 상점들이 진출하였다. 와카마츠에는 서일본 각지에서 노동자와 무뢰한들이 몰려들었고, 무질서해지는 신흥 도시 속에서 이소키치는 독자적인 지위를 구축해 나갔다.
당시 일본 최대급의 석탄 적출항이 된 와카마츠에서는 혹독한 석탄 하역 노동을 통해 ‘가와스지 기질’과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에 이르는 전성기에는 약 4천 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는 석탄 하역 인부들이 ‘곤조’라 불리며 도시의 활기를 떠받치고 있었다.

임협 정치가로서의 활약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메이지 시대는 ‘오야분과 고분’ 관계를 당연시하며, 임협적(任侠的) 기풍을 지닌 조정자를 요구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가운데 완력과 담력은 물론, 조정자·상담자로서의 지혜를 겸비한 이소키치는 1910년, 오사카 스모 협회의 오제키였던 하나레고마가 도쿄 스모 협회로 이적하며 양 협회가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을 수습해 명성을 떨쳤다.
그 후 48세에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어 민정당에 소속되었으며, 1921년 정우회의 일본우선(日本郵船) 장악 시도를 사전에 저지한 공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정계에는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한다’는 논리가 공공연히 통용되었고, 정치가에게는 그러한 역량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이소키치는 이러한 거친 정치 세계 속에서도 뛰어난 조정 능력과 두터운 신망으로 일목을 받는 존재가 되어, 1932년까지 17년간 국정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아시야촌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훗날 ‘정계의 흑막’이라 불린 스기야마 시게마루와의 교류는 이소키치의 정치 활동을 뒷받침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업을 통해 지역에 기여한다
요시다 이소키치는 실업계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고향 와카마츠는 물론 기타큐슈 산업계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관영 야하타 제철소 개설에 따른 혼란을 수습하고, 석탄 유통의 요충지였던 와카마츠항에 거점을 두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히라야마 탄광, 요시다 상사, 와카마츠 어시장, 와카마츠 운수 등의 사장을 역임하며 탄광업·물류·상업 등 폭넓은 분야에서 사업을 전개했고, 산큐 운수, 오타니 탄광, 도바타 어시장 등의 설립에도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분쟁 조정과 업계 조율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1916년, 와카마츠 석탄상 조합과 어업조합 사이에서 발생한 도카이만 침몰 석탄 인양 분쟁은 이소키치의 중재로 원만히 해결되었으며, 석탄 광업 상호부조회 고문으로서 광업 분야의 협력 체제 강화와 와카마츠 지역의 경제·고용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타카토야마 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지역의 중진으로서 분쟁과 트러블의 중재에 동분서주하며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증거이며, 요시다 이소키치의 활동은 지역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 게이이치로가 본 아버지의 진실
1936년 1월 17일, 이소키치는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당일에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조문객이 2만 명을 넘어, 당시 와카마쓰시의 세대 수(약 1만 3천 세대)를 웃도는 규모였다. 끝없이 이어진 장례 행렬에는 전직 총리와 민정당 총재를 비롯해 시의원·도의원, 재향군인·소방단원·소년단·애국부인회, 심지어 기생들까지 가세하여 시민 총출동으로 배웅하였다.
훗날 개신교 교회의 목사가 된 요시다 게이타로(이소키치의 양자)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 성대한 장례식을 지켜본 듯하다.
타카토야마에 세워진 동상에 새겨진 비문에는 “몸에 문신 하나 없고, 천하의 협객으로서 평생 타인을 상처 입힌 적도 없으며, 단 한 번의 전과도 없는 오야분, 참으로 세상에 비길 데 없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수나 사욕을 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남몰래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는 데 온 힘을 쏟았으며, 언제나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트러블을 중재해 화해시키던 인자한 인품과 고향 와카마쓰에 대한 깊은 향토애야말로 요시다 이소키치의 진정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