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가 정신과 자선활동
사토와 야스카와에게서 보는 ‘부의 철학’
PICK UP 특집
와카마츠의 두 거장, 사토 게이타로와 야스카와 케이이치로의 사례는 실업가와 자선 활동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실업가로서의 성공은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사회적 과제(산업 인재 부족, 문화 보급, 빈곤층 구제 등)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이 도구를 최대한 활용해 와카마츠, 더 나아가 일본의 근대화에 필수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사토 게이타로: ‘공사일여’의 신념과 문화·복지 진흥
‘석탄의 신’이라 불린 사토 게이타로는 부를 “사회로부터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공사일여(공적·사적 이익의 일체화)를 평생의 행동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미국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불명예”라는 사상에 감명을 받아, 전 재산의 사회 환원을 실천했다.
그의 사회 환원 활동은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업적은 재정난에 빠져 있던 도쿄부 미술관(현 도쿄도 미술관) 건립을 위해 100만 엔(현 가치 약 40억 엔)을 기부하여 일본 최초의 공립 미술관 개관을 실현한 것이다.
또한 그는 빈곤층의 생활 개선을 중시하여 대일본생활협회와 사토신흥생활관(현 야마노우에 호텔 본관) 등 사회운동의 거점을 설립하고, 병원 건립·기증, 고아원·양로원 지원 등 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여자부에 기부해 여성의 법학 교육 기회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데 기여했으며, 고향 와카마츠에서도 도서관 건립을 지원했다.
사토의 업적은 실업가로서의 성공을 문화 발전과 생활 문화 향상을 내건 사회 개혁으로 승화시킨 데 있으며, 카네기식 사회 환원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실천한 인물로 높게 평가된다.
야스카와 케이이치로: ‘국가 백년지계’를 내다본 산업·교육 실천
야스카와 케이이치로 역시 사업으로 얻은 부를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그의 기업가 정신은 “산업을 일으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강한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자선 활동의 중심에는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 기반 구축이 있었다.
그의 사회 공헌 중 가장 주목할 점은 교육 분야다.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고급 기술 인력이 부족한 현실을 우려한 그는 1907년 사재를 투자해 메이지전문학교(현 규슈공업대학)를 설립했다. 이어 메이지학원을 창립해 초등에서 고등까지 일관된 기술자 양성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는 일본 산업 발전을 지탱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선견적 투자였다.
또한 와카마츠 축항의 사장으로서 도카이만 확충을 강력히 추진해 와카마츠를 거대한 석탄 수출항으로 발전시켰다. 1901년 관영 제철소의 야하타 유치를 위해尽力한 것은 북큐슈 지역을 일본 산업의 중심지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신해혁명 이후 손문의 생활을 장기간 지원하는 등 국제적 시각에서의 정치 활동도 펼쳤다.
사토와 야스카와의 업적은 실업가로서의 성공이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실천한 ‘실업가 정신과 자선의 융합’은 기업이 사회에 제공하는 가치를 ‘이익’과 ‘공익’ 두 측면에서 극대화하는 것이며, 지역에 잠든 ‘가능성’을 발견해 이를 실현하는 열정과 유연한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환원의 사토 · 창조의 야스카와 https://wakaten.net/wp-content/uploads/2025/11/My-Movie.mp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