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진흥」의 거인들 (2)
사토 케이타로의 생애와 유산
PICK UP 특집
사업가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그 부의 거의 전부를 사회 환원에 바친 드문 인물, 그것이 바로 ‘석탄의 신’이라 불린 사토 케이타로입니다. 그의 생애는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공사일여(公私一如)’의 신념에 기반한 웅대한 자선 활동으로 관통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보여준 ‘자신이 쌓아 올린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도쿄부 미술관(현 도쿄도 미술관) 설립 지원을 비롯한 사토 케이타로의 업적은 현대 일본의 문화·교육·사회 기반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위대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꿈의 좌절과 새로운 도전: 젊은 시절의 고투(1868년~1892년)
사토 케이타로는 1868년, 온가군 진노하루촌(현재 기타큐슈시 야하타니시구)에서 사토 코사쿠의 장남으로 태어나,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급변하는 메이지 시대의 격류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법조인을 꿈꾼 케이타로는 1886년, 옛 번교의 전통을 계승한 후쿠오카현립 영어전수 수유관(현 수유관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법조인의 길을 걷기 위해 수유관을 중퇴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 상경했습니다. 1887년에는 메이지 법률학교(후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메이지 법률학교는 프랑스 법학을 기반으로 한 질 높은 교육으로 알려져 있었고,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습니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리하게 학업에 힘쓴 결과,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케이타로는 심각한 각기(脚氣)에 시달리며 장기 요양 생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각기는 국민병 중 하나였고, 그는 법조인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실의 속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석탄의 신’의 탄생: 사업가로서의 성공(1892년~1922년)
잠시 요양 생활을 보낸 후, 1892년 케이타로는 재기를 걸고 당시 규슈의 석탄 수송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와카마츠로 향했습니다. 그는 와카마츠 최고의 석탄 상인인 야마모토 슈타로 상점에 취직했으며, 이곳에서 슈타로의 의붓여동생인 토시코와 결혼하고, 아내로부터 부기 등 상업의 기본을 배웠습니다.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타고난 통찰력과 근면함으로 석탄 거래의 노하우를 철저히 익혔으며, 석탄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츠쿠보(筑豊)의 어느 탄광에서 캐낸 것인지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석탄의 품질을 연구했습니다. 입사 8년 후인 1900년, 그는 야마모토 상회에서 독립하여 ‘사토 상점’을 설립했습니다.
사토 케이타로가 사업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와카마츠 항의 미래 가능성을 간파한 탁월한 통찰력과 혁신적인 유통 방식 개발에 있었습니다.
와카마츠 항은 일본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에너지원이었던 석탄의 수출항으로, 메이지 후반기에서 다이쇼기에 걸쳐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케이타로는 기존의 유통망뿐 아니라, 복잡했던 환적 방식을 일신하고 모지항에 정박하는 선박으로의 석탄 직적 방식이라는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는 물류 속도와 비용 효율을 크게 개선하는 것이었으며, 와카마츠의 석탄 유통 경쟁력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품질이 낮다고 기피되던 오쿠마탄(大隈炭)을 도자기 산업이나 포경업에 판매하여 석탄 수요를 확대하고, 츠쿠보탄 전체의 평가와 유통량을 높이며, 석탄 수출항 ‘와카마츠’의 위상 향상에도 기여했습니다.
일러일 전쟁 이후 석탄 수요의 급등을 기회로 본 케이타로는 1908년 탄광 경영에도 뛰어들어, 석탄 중개업에서 탄광 경영, 나아가 무역·해운·창고업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그의 석탄 사업에 대한 탁월한 수완과 업적으로 인해 ‘석탄의 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와카마츠 시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시의회 의장 등 공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미쓰비시 광업의 감사역에도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지병 악화를 우려한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이 시기부터 점차 경영 1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부(富)는 사회로부터 맡겨진 것: ‘공사일여(公私一如)’의 자선 철학
사토 케이타로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쌓은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공사일여’의 신념입니다.
그는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라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재산은 사회로부터 맡겨진 것이며,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책임이다”라는 철학을 평생 실천했습니다. 그의 자선 활동은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문화 발전과 사회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한 웅대한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사토 케이타로의 자선 활동에서 상징적인 사례는 도쿄부 미술관(현 도쿄도 미술관) 건설 지원입니다. 1921년, 그는 일본 최초의 공립 미술관 건설이 자금난으로 좌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케타로는 “상설 미술관을 건설해야만 고미술을 보호하고 새로운 미술을 장려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의 문화 진흥을 위해 공립 미술관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즉시 기부를 표명했고, 건설 자금 전액 100만엔(현재 가치 약 30억엔)이라는 전례 없는 금액을 출연했습니다. 이러한 사토의 과감한 결정과 거액 기부 덕분에 도쿄부 미술관은 1926년에 무사히 개관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본격적인 필란스로피(자선 활동)의 선구적 사례로, 현재 도쿄도미술관 내 아트 라운지에는 아사쿠라 후미오가 제작한 사토 케이타로의 흉상이 설치되어 그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생활 기반 향상에도 힘썼습니다. 1935년에는 곤궁자(困窮者)의 생활 개선과 교육을 목적으로 ‘대일본생활협회’를 설립했습니다. 1937년에는 이 운동의 거점으로 150만엔(약 45억엔)을 들여 ‘사토 신흥생활관’(현 야마노우에호텔 본관)을 건설했으며, 이는 빈곤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 선진적 사회 복지 사업이었습니다.
게다가, 법조인을 꿈꾸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케이타로는 여성이 법률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개교한 메이지대학 전문부 여자부(법학·상학) 교사 건설에 거액을 기부하여, 여성이 법률을 배울 기회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한 최초의 학교 설립에도 기여했습니다.

말년과 영원히 이어지는 유산
경영 1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케이타로의 사회 공헌 의지는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1934년, 그는 자신의 타카토산(高塔山) 기슭의 광대한 저택 토지와 건물을 와카마츠시에 기증했습니다. 이 부지는 현재 ‘사토공원’으로 와카마츠 구민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저택 기증 후, 그는 요양을 위해 벳푸로 이주했으며, 1940년 1월 17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토 케이타로의 ‘공사일여’ 철학은 그의 사후에도 철저히 이어졌습니다. 그는 유언을 통해 모든 유산 188억엔(약 56억엔)을 기부했습니다. 이 기금은 벳푸시 미술관 및 체육관 건설비, 젊은이 육성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사토 육영재단 설립 자금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생애를 통해 근대 사회에서 사업가 정신과 자선 활동의 이상을 체현했습니다. 와카마츠 석탄 산업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 ‘석탄의 신’이라 불린 그가 남긴 유산은, 도쿄의 문화 예술, 기타큐슈의 교육·복지, 벳푸의 문화 시설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남아, 시대를 초월해 일본의 문화와 사회 기반이 되었습니다.
“부는 사회로부터 맡겨진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은 현대 기업 경영자와 자산가에게도 사회 공헌의 방향을 생각하는 중요한 지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토 케이타로와 도쿄도 미술관의 발자취 https://www.youtube.com/watch?v=WyHVd-SwsM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