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발전」에 공헌한 거인들 (Ⅰ)
야스카와 케이치로, 그의 업적과 뜻
PICK UP 특집
내고장을 창조하고 미래를 여는 힘.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뜻을 가진 개인의 열정과 행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에도시대 말부터 메이지시대 초기까지 격동의 시대에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고 키타큐슈의 초석을 다진 한 거인, 야스카와 케이이치로. 그의 생애는 바로 「내고장 발전」을 위한 헌신의 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젊은이들이 내고장에 눈을 돌리고 그 가능성을 믿는 계기가 되도록,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더듬어 봅니다.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성장 배경, 학업과 결혼
야스카와 케이치로는 1849년5월 9일, 치쿠젠 사와라군 토리카이촌(현재의 후쿠오카시 토리카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후쿠오카 번사(무사)인 토쿠나가 쇼에키(德永省易), 어머니는 쿠메(久米)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학문에 대한 남다른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에도 말기,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격화되고 나라 정세는 불안정했습니다. 이 격동의 시대가 후일 케이치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케이치로는 번교 수유관에서 공부한 후, 당시 최신 학문을 배우기 위해 케이오기주쿠 학교에 진학합니다. 여기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서 실학과 독립자존의 정신에 감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학업 도중에 바로 위 형인 토쿠나가 메구무가 전사하는 비극이 일어나 급히 귀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게이치로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동시에 일찍이 가문을 지키고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의식을 싹트게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 중 하나는 결혼이었습니다. 1864년, 16세에 야스카와 오카에몬의 양자가 되었고, 18세 때 오카에몬의 넷째 딸인 미네코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하면서 이름을 '게이치로'로 개명했습니다. 이 결혼은 그가 새로운 가문을 세우고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미네코는 케이치로의 사업을 뒤에서 지원하며, 이후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걸쳐 중요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창업과 업적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진가는 탁월한 기업가 정신과 국가 백년의 계를 내다본 장대한 사업의 전개에 있습니다. 그는 일본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산업 발전이 필수라고 확신했습니다.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은 1877년 아시야에서 석탄 판매업을 시작한데서부터 입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석탄왕'으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에는 아이다 탄광과 쇼지 탄광의 경영을 시작하는 등, 탄광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석탄이라는 에너지원이 필수적이었고, 케이치로는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86년에는 활동 거점을 와카마츠로 옮겨, 메이지 탄광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1888년에는 와카마츠 축항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석탄 수송의 요지가 될 항만 정비에도 나섭니다. 이듬해 1889년에는 아카이케 탄광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의 사업의 기반을 다진 데는 차남 마츠모토 켄지로와의 부자(父子) 두 사람이 삼위일체가 된 체제가 큰 몫을 했습니다. 1893년 설립된 야스카와 마츠모토 상점에서는 야스카와 자신이 탄광 경영에 주력하고, 마츠모토 켄지로가 석탄 판매를 담당했습니다. 이 강력한 협력 체제가 사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능케 했습니다. 1896년에는 메이지 탄광 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모지에 사무소를 설치했습니다. 토쿄, 오사카, 코오베로 지점을 확대하여 그 사업은 전국 규모로 발전하게 됩니다.
1908년에는 메이지 광업 주식합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케이치로는 “산업을 일으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강한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신념을 바탕으로 잇달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메이지 방적(1908년), 야스카와 전기(1915년), 큐슈 제강(1917년, 이후 야하타 제철과 통합), 쿠로사키 요업(1918년) 등 다양한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며 일본의 산업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 공적은 “동쪽의 시부사와, 서쪽의 야스카와”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큐슈 철도 이사, 와카마츠 축항 사장, 치쿠호 석탄 광업조합 총장, 메이지 광업 사장, 큐슈 제강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일본 경제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22년 경제계에서 은퇴하기까지 그가 남긴 업적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회공헌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위대함은 사업가로서의 수완뿐만 아니라 사회공헌에 대한 깊은 식견과 실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업으로 얻은 부를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의 사회공헌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881년 겐요샤의 사원이 되어 자금 지원을 한 것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토야마 미츠루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문을 코오베로부터 토쿄로 맞이하여, 자신의 옆집을 손문의 은신처로 빌려주고, 4년간 매월 500엔의 생활비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의 미래를 내다본 케이치로의 넓은 시야와 국제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힘을 쏟은 것은 교육 분야에 대한 기여입니다. 그는 1907년, 메이지 전문학교(현 큐슈 공업대학)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인재가 부족했습니다. 케이치로는 이 현실을 안타까워하여, 스스로 사재를 투자하여 기술자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결심한 것입니다.
1909년 4월에는 메이지 전문학교가 개교하였고, 1910년에는 메이지 전문학교 부속 초등학교(현 메이지 학원)를 창립하여 초등 교육부터 고등 교육까지 일관된 교육 기관을 구축했습니다. 교육이야말로 국가 건설의 기반이라는 그의 신념이 이러한 학교 창립에 결실을 맺었습니다. 중화민국 전 임시 대총통으로 망명한 손문을 메이지 전문학교에 초대한 것도 그의 국제적 시야와 교육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1914년 그는 중의원 총선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귀족원 남작 의원을 지내다가 1925년 7월에 은퇴했습니다. 정치·재계에서 일본의 발전에 기여한 야스카와 게이이치로는 1934년 11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역 공헌 (치쿠호탄전 경영과 키타큐슈·와카마츠 정비)
야스키와 케이치로(安川敬一郎)는 특히 키타큐슈, 그중에서도 와카마츠 지역의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치쿠호탄전(筑豊炭田) 경영을 통해 일본 산업을 뒷받침했으며, 그 석탄을 효율적으로 수송하기 위한 항만·철도 정비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와카마츠 축항 사장으로서 와카마츠 항의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항만의 준설과 시설 확충을 통해 와카마츠는 일대 석탄 적출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치쿠호탄전에서 채굴된 대량의 석탄이 와카마츠로부터 국내외로 운반, 일본의 근대화에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와카마츠역과 와카마츠 기관구가 화물 취급량에서 단연 일본 1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사실 또한 그가 구축한 인프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후지키나 후루마에, 미야마루 이서까지 펼쳐진 저탄장(석탄 야드) 은 당시의 성황을 말해줍니다.
제철소 유치에 진력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지역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 중 하나는 관영 제철소의 야하타 유치를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지반이 단단하고 지진 등 재해가 적다는 지리적 우위성. 치쿠호 탄전으로부터 대량의 안정적인 석탄 공급. 온가강과 도카이만을 호리카와로 연결하여, 치쿠호에서 석탄 수송을 원활하게 하는 내륙 수송로 확보. 5천 톤급 철광석을 실은 선박이 입항할 수 있도록 대규모 준설 공사를 추진하여 항만을 정비하는 계획 등, 다른 후보지를 능가하는 도카이만 지역의 잠재력을 제시함으로써 온가군 야하타촌(현 키타큐슈시 야하타히가시구)이 제철소 건설의 유력 후보지로 부상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후 4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01년에 가동을 시작한 관영 제철소는 일본 중공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제철소 유치는 바로 키타큐슈 지역을 일본 산업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결정타가 되었으며,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와카마츠에 있던 야스카와 저택
야스카와 케이치로가 와카마츠에 세운 광대한 저택은 당시 와카마츠의 번영과 그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채는 약 3,700평이라는 규모를 자랑했으며, 현재 와카마츠구청 동쪽에서 에비스 신사를 거쳐 와카토 대교 교각에 이르는 광대한 부지였습니다.
이 대저택은 단순한 개인의 주거 공간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는 장소이자 와카마츠의 미래를 논의하는 살롱 같은 역할도 했습니다. 케이치로는 이 저택에서 많은 내빈을 맞이하여 지역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야스카와 저택은 바로 와카마츠 지역 조성의 거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경제적 활황을 보여주는 일화로서 하카타 역장이 2계급 특진으로 임명장을 받은 곳이 와카마츠와 모지코 항의 역장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와카마츠가 야스카와 케이치로의 노력으로 얼마나 중요한 경제적 거점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 야스카와 저택 https://www.yaskawate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