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되는 “와카마츠 스피릿”
~타마이 킨고로·만, 히노 아시헤이, 나카무라 테츠의 계보~
PICK UP 특집
왜 지금 “꽃과 용” 인가?
소설 “꽃과 용”의 영화제작, 키타큐슈시에서의 로케이션 개시에 즈음하여 배우 이와키 코이치 씨가 후쿠오카현청을 예방! 이런 네트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지금, 이 시대에, 꽃과 용?”
지금까지 6번이나 영화화된 우수 콘텐츠이기는 하나, 레이와(일본의 현재 연호)에 들어온 지금, 히노 아시헤이란 작가뿐만 아니라 이 소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20대의 지인 4, 5명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처음 듣는 이름이고, 타이틀이라고 한다.
키타큐슈 와카마츠의 출신 작가, 히노 아시헤이가 자신의 부모를 모델로 쓴 소설 “꽃과 용”
메이지 시대(1868-1912) 중기부터 일,중전쟁 직전의 키타큐슈를 무대로 “타마이 킨고로”와 아내 “만”의 파란만장한 가족의 역사를 그린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설명했으나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 이렇게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 소설을 읽은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참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꽃과 용” 을 다시 읽었다.
읽어보고 너무 재미있음에 새삼 놀랐다. 70년 전에 쓰인 소설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주인공 타마이 킨고로의 캐릭터를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타카쿠라 켄 (일본의 대표적인 배우)의 영화 속에서의 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야쿠자 즉, 말보다 폭력이 먼저인, 의리의 남자라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실제는 폭력을 싫어하고 노동자의 생활 향상을 우선으로 생각한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은 후, 좀 더 그에 대해 알고 싶어져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보았더니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카무라 테츠” 의사의 방에 할아버지 타마이 킨고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는 신문 기사를 발견했다.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용수로를 만들어 65만 명의 생활과 생명을 구한 나카무라 테츠 의사는 어머니 “히데코”가 타마이 킨고로와 만의 차녀이다. 장남인 히노 아시헤이(본명·타마이 카츠노리)는 백부가 된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노동자를 위해 땀을 흘린 타마이 킨고로와 만. 평생을 문학 속에 오로지 서민의 기쁨과 슬픔을 그려 온 히노 아시헤이, 그리고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흉탄에 쓰러졌으나, 30년간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의 부흥에 목숨을 걸어 온 나카무라 테츠 의사.
이 세 사람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흐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낳고 키운 와카마츠라는 풍토란? 그들이 간직한 스피릿이란 어떤 것인가.
머릿속에 크게 부풀어 오른 몇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와카마츠에 있는 “카하쿠도”에 히노 아시헤이 자료회 회장인 사카구치 히로시 씨를 방문했다.
“카하쿠도”는 캇파(거북이 모습을 한 전설 속의 요괴)가 사는 집이라는 의미로서, 히노 아시헤이가 캇파를 각별히 사랑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여기서 1940년부터 19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대부분을 보냈고, “꽃과 용” 등 많은 작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사카구치 씨는 생전의 「나카무라 테츠」 씨와도 친교가 있어, 현재는 “카하쿠도”와 히노 아시헤이 자료관 관리 운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다.
카와수지 카타기 (기질)란 ?
“혈연관계라는 것 이외에도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인사도 채 끝내지 않은 채 결론부터 재촉하는 나의 성급한 질문에, 온화한 미소로 사카구치 씨는 대답해 주었다.
“카와수지 기질이지요. 한마디로 약자를 돕고 강자에 굴하지 않는 정신이죠. 이것은 면면히 타마이 킨고로, 만, 히노 아시헤이, 나카무라 테츠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와수지 카타기는 온가강 유역을 비롯하여 석탄산업이 번창했던 치쿠호 지역와 석탄 적출항이었던 와카마츠 지역의 사람들이 가진 기질을 말한다. 기성은 거칠지만, 인정이 많고, 외지로부터 온 사람에게도 차별 없이 대하는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다.
“와카마츠는 석탄을 통해 富를 이루고자 전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 그래서 여기서 서로 돕는 정신이 일어난 거죠. 나는 이전부터 이 “카와수지”를 세계의 보편적 용어가 되도록 제안하고 있어요. KAWASUJI라고 로마자 표기로 해서 말이죠. 신자유주의나 약육강식의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모럴이자 가치관이 KAWASUJI라고. 특히 와카마츠는 항구도시로서, 각국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찾아드는 국제 도시였기 때문에 KAWASUJI 스피릿이 집약되어 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와카마츠로부터 세계를 향해 KAWASUJI 를 발신하고 싶습니다”
호탕하게 웃는 사카구치 씨를 보면서 전 세계 사람들이 KAWASUJI라 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 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인물상에 관해 묻기로 하였다.
먼저 타마이 킨고로에 대해. 소설 “꽃과 용”에 따르면 에히메에서 태어난 그와 히로시마 출신인 “타니구치 만”은 함께 야심을 품고 고향을 떠나 모지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석탄 하역노동을 하는 동료로서 서로 만나 메이지 36년(1903)에 결혼한다.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 동력 비행에 성공하고, 토쿄에 처음으로 전철이 운행된 해이다.모지, 와카마츠는 탄광 경기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만”은 20세, “킨고로” 24세.
토바타, 와카마츠, 야하타 3개 도시가 인접한 공장의 굴뚝과 선박이 오가는 도카이만을 눈앞에 두고 킨고로의 마음은 기대에 부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와카마츠에서 석탄하역 하청업 “타마이 구미(玉井組)”를 창업하게 된다.
세 사람 각자의 매력
타마이 킨고로의 매력에 대해,
”역시 카와수지 남자의 전형이라고 할까, 상부상조의 정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는 비록 상대가 미츠이, 미츠비시와 같은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죠. 무엇보다 아내 만이 여장부였어요. 아무리 강한 킨고로라 해도 만에게는 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고 하는 사카구치 씨.
킨고로 사망 후, 일가와 많은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통솔했던 것은 “만”이었다고 한다. 화로 앞에 태연하게 앉아 담뱃대로 담배를 피웠다.
나카무라 테츠 의사도 할머니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 해도 존중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할머니의 설교가 “자신의 윤리관이 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그의 저서에 남기고 있다.
히노 아시헤이의 매력에 대해,
“역시 작가로서 남긴 커다란 업적이죠. 뭐니 뭐니 해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1년이 채 되지도 않을 무렵에 당시의 2대 신문, 아사히와 마이니치 신문에 동시 연재를 시작했으니까요.전쟁 중에 보도반원으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밀과 병사」 등을 전지에서 집필하여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니까 대단한 거예요”
그가 분뇨담(糞尿謂)이라는 말 그대로 분뇨를 둘러싼 유머와 애수를 담은 소설로 제6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것이 31세.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된 쇼와 13년(1938)이었다.
당시의 선고위원이었던 기쿠치 칸(菊池 寛)은 “무명 신인 작가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수여함은 이 상의 창설 취지에도 적합하고, 우리 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선정했다. 분뇨라는 혐의스러운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에 운치가 있고, 일맥의 애감이 담긴 절묘한 묘사 등, 훌륭한 작품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 무명작가는 전쟁터에서도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밀과 병사”로서 발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무척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술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사람을 만나는데 맨정신으로 대하기 어색해서 어쩔 수 없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고향으로부터 수준 높은 문화, 문학을 배출하려고 이 고장의 문화 활동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국민적 작가가 자기 고장을 위해 시간을 내고 열정을 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라고 하는 사카구치 씨.
어린 시절을 와카마츠에서 보내고, 백부 히노 아시헤이와도 접했던 나카무라 테츠 의사는 아시헤이의 문학비에 새겨진 “흙 묻은 배낭에 꽂은 한 송이 국화꽃 향기여, 이국의 길을 가는 병사의 눈에 사무치는 푸른 하늘”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인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그리고 인간의 약함과 추악함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한 시, 와카마츠 항을 내려다보는 타카토 산 중턱에 서 있는 문학비에 새겨진 이 구절이 가슴 시리도록 다가왔다” (“하늘과 함께 있다”로 부터)
그런 나카무라 의사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카구치 씨에게 물어본다.
“그도 역시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많이하는 편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무뚝뚝하게 보였죠. 이쪽에서 물어보면 대답해 줍니다만, 스스로 유창하게 말하는 일은 없었죠. 그냥 묵묵히 일만 하는 킨고로, 아시헤이, 이 점에서는 세 사람이 매우 닮았네요”
페샤와르 회에 노벨 평화상을
나카무라 의사는 쇼와 21년(1946)에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쇼와 천황이 인간 선언을 한 해이다. 큐슈대학교를 졸업 후 의사가 되어 국내 근무를 거쳐,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병원에 부임하게 된다. 이후 현지에서 한센병 등의 치료에 주력하는 한편 난민캠프와 산악지역에서의 진료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심한 가뭄이 아프간을 덮쳤을 때 의료만으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안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독학으로 공부하고 몸소 땀을 흘려 우물을 파고 용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1만 6500헥타르, 와카마츠 구의 2배 이상의 토지를 농사가 가능한 토지로 바꾸어 65만명의 생명을 구했다.
“카와수지 기질의 궁극을 보여준 것이 나카무라 테츠 씨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는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카와수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삶의 방식, 그가 한 행동을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겁니다. 나는 그가 만들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페샤와르 회에 노벨 평화상을 주었으면 해요. 그만큼 그 활동은 사회 운동으로서도 굉장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타마이 킨고로, 히노 아시헤이, 나카무라 테츠. 이 세 사람을 낳은 와카마츠라는 토지의 매력에 대해 사카구치 씨에게 물어보았다.
KAWASUJI가 세계를 구한다
”무엇보다 일본의 근대화를 서민의 힘으로 이루어왔다는 풍토. 그 속에서 자라난「카와수지」기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앞으로는 지금과 같은 신자본주의 그대로는 통하지 않는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제안하고 싶은 것이 카와수지 기질. 약자를 돕고, 강자에 굴하지 않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가 돕는, 이런 모럴을 모두가 가진다면 좀 더 즐거운 삶이 되지 않을까. 약육강식의 세계에 불안해하기보다 카와수지 정신에 의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KAWASUJI를 세계 공통언어로 하여 와카마츠로부터 세계를 구하자, 라고 허풍을 떨고 다닌답니다.”
눈을 가느다랗게 하고 호탕하게 웃는 사카구치 씨를 보면서 아! 여기에도 또 한 사람 KAWASUJI가 있었구나, 흥분되어 나도 모르게 ” 나도 그 허풍에 한 표! 를 던지고, 악수를 나눈 후 카하쿠도를 뒤로 하였다.